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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사회복지 전문가이십니까?

  • 관리자 2019-03-05 11:44 hit : 658 link

  • 과거 뿐 아니라 지금도 '사회복지사가 전문가인가?' 에 대한 논쟁이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직업이나 착한 직업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렇게 말한다. "좋은 일 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클럽이라는 봉사단체에서 찾아오셨던 한 분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나도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는데  
    지금은 열심히 돈 벌고 나중에 나이들어 좋은 일 해보려고 땄다. 나이들면 기억력이 떨어져서 자격증 따고 싶어도 못딸가봐 미리 준비했다."란다.  
    떫떠름한 표정으로 웃었다. 

    영리 쪽, 교수님들이나 연구자들과 종종 자리할 때가 있다.  사회복지의 비영리함? 에 대해 너스레도 떨곤한다.  그리고는  
    "그건 나도 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하긴, 논리적이고 결과 값이 딱 나오는 실용적 학문을 하는 이들에게는
    비영리가 그야말로 비영리한 학문이겠지. 오죽하면 사회복지현장도 사회현상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사회과학'이라는 
    용어까지 등장시켰겠는가?  이분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사회과학을 통한 인간행동과 사회환경 등 여러분야로 그분들께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그 고정관념을 깨기에는 신통치 않다.  

    이런 일들은 이미 100여 년전에 있었다.  1911년, 미국에서다. 

    당대 의학자였던 아브라함 플랙스너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복지사는 전문가의 활동을 단지 중간에서 중재하는 역할이므로 사실상 전문가는 아니다." 
    뼈아픈 소리다.  
    이에 대하여 1915년부터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논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지역아동센터의 전문성과 공공성 제고 앞에서 지역아동센터중앙지원단이 다양한 방법으로 논문을 쏟아내는 일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주최되는 종단연구와 논문 발표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1930년 대공황 이후,  
    정신분석의 대가 프로이드의 진단주의나 융과 오토랭크 등이 주장한 기능주의가 등장하면서 
    사회복지사가 전문가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숙주의, 행동주의, 정신분석과 인지발달, 그리고 구성주의의 등장은 
    사회사업 전문성의 체계를 만들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전문성의 비판 역풍때문에 사회복지의 체계가 견고하게 세워지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역시 좋은 일, 착한 일을 하는 좋은 이웃이라는 관념을 벗어나 전문성을 세우고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늘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이는 나의 이런 생각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으니 전문가다."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사회복지 전문가가 얼마나 될까? 장농 자격증도 있으면 전문가인가?
    장농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운전의 전문가인가?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전문성의 격을 떨어뜨리는 부끄러운 말이다. 
    과연, 우리가 아동복지와 돌봄에 있어서 사회과학의 체계를 세울 만큼 얼마나 전문적일까? 
    근간에 정부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남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든지 사이버에서 1년이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데 찬성하는가? 급속도로 자격증 따는 데 전문가아닐까? 스스로 전문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궂이 현장전문가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래서 더 궁색하다.  

    나는 사랑하는 한지연 회원들께 만큼은 이렇게 강조하고 싶다. 
    "배우지 않으면 성장을 중단한 것이며 아동복지 전문가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인정할 때 비로소 전문가라 할 수 있다는 것!" 


    하나 더, 
    현장은 보편화된 돌봄을 주장하고 있다. 나도 물론 그렇게 주장 해 왔고 찬성하는 입장이다. 
    아동기준은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차별과 낙인,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고 선택의 영향이 빠져있어 
    강제조항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것이다. 몇년 내, 그렇게 될 것으로 보고있다. 
    그런데, 이게 좀 골치 아프게 되어있다. 1985년도 산돌 공부방으로 시작해(당시에는 민간의 자발적 공부방 형태이지만) 근 20년 뒤 
    2004년도에 법제화 할 때는 예산 항목 자체가 산동네, 빈곤 아동으로 상징되는 취약계층의 예산 성격과 사교육비 문제 해결이라는 
    노무현 대통령 공약(사교육 해결과 기회균등 외)과도 연계되어 있어 이것을 수정할 때 사업의 성격과 취지가 수정되어야 한다.  
    애초 예산의 시작이 그렇게 셋팅되어 큰 틀의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벽을 허무는 순간 모든 아동을 돕는 보편적 복지서비스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방법론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지역 방과후 공부방으로 시작한 지역아동센터의 출발과 법제화, 그리고  예산편성의 의미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 고민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정부는 보편화의 기로에 서 있는 지역아동센터에 반드시 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럼 너희들도 다함께돌봄처럼 수익자부담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아니면 바우처 형태로 이용자가 선택하면 좋겠다.  다 동일한 체계니까!"
    수익자들이 부담하고 기본적인 인건비만 다함께돌봄처럼 지원하면 되겠는가?  그리고 자율경쟁, 예산 투입시 전문성 제고를 가장 우선시 하는 
    정부가 어떻게 키를 잡을까? 아동복지시설의 모금 체계는?  바우처를 자주 언급하는건 이미 정책적으로 시장에 맡기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고
    자율 시장경제이 체계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과거 사례관리를 현장이 도입했을 때 다수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거부할 때 유독 한 단체가 사례관리를 놓치면 안된다고 한 단체가 있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당시 시스템은 두명의 종사자가 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실제 돌봄 서비스를 하면서...) 범위는 지나쳤다. 
     지금까지도 그분들은 사례관리를 놓친것이 전문성을 포기한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나 또한 사례관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했고 현장의 실천 및 해결사례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사례관리의 전문성에 있어서 학계부터도 "그건 아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고 급기야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물리적 한계를 정부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  전문성은 내가 규정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의사가 전문성이 없으면 돌팔이라고 하듯, 앞으로 보편적 자율경쟁으로 들어가면 우리 스스로의 전문성이 앞으로 강조될 것이다.  
    시대적 변화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도 지역아동센터가 필두에 세우지 못한 이유로 다수의 민간 운영이라는 행정적 부담과 
    시급한 공공성의 문제가 작동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가 변해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 지역아동센터가 공부방 시절, 사람들은 단순히 아이들을 돌보고 공부가르쳐 주면 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학부모들은 데리고 공부만 가르쳐주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미 Need에서 Want로 욕구가 이동했다.  
    그것은 사교육의 대안이 될수도 없을 뿐더러 방과후돌봄의 전인적 교육 철학과도 어긋난다.  
    특히 방과후돌봄기관의 사회적 정의에서 가정과 학교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연결점이자 가정의 기능을 보완하는 데 촛점을 둔다. 
    따라서 지금은 전화기를 주는 시대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줘야 하는 시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만간 복지부는 틀림없이 바우처 제도 도입을 들고 나올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간과 접촉할 때 가장 들기 쉬운 카드다.  
    결국, "돌봄도 시장경제에 맡겨보자."   흐름을 읽고 멀리 봐야 한다. 그래야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다함께돌봄의 여파로 현장이 요동치고 있지만 정부의 꼼수나 계략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정부는 이미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나는 그래서 국장급 복지부TF가 부담스럽다.  다 내생각 같지는 않고 하나의 의견만 내라고 하니 결국은 끌려갈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연합을 위하는 길이 무엇일까? 또 하나의 대안 세력을 현장이 원할까?  
    어려운 틈새를 타고 편승하지 않도록 소신을 지켜야 한다.  정당함은 방법에서도 정당한 법, 어려운 틈새를 찾는 편승은 분열을 촉진할 뿐!
    입은 더 많아지고 그 어떤 곳도 내려놓지 않는 이상 7개가 8개가 되고 곧 10개가 될 것이다.  
    연합은 내려놓음과 배려,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